작성일 : 04-03-2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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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가 아무리 평화 원해도 현 제도에서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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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원장 ‘무쟁의’ 깨져…새로운 노동운동 ‘현장의 힘’ 필요
서울지하철노조 배일도 위원장의 5년 아성이 무너졌다. 배 위원장은 지난 99년 9대 위원장에 당선된 뒤, 10대, 11대 등 5년 동안 서울지하철노조의 ‘수장’ 역할을 맡아 왔다. 초대 위원장 역임까지 합하면 서울지하철노조 역사상 ‘최다 위원장 당선자’로 기록된다. 10대 위원장 시절인 지난 2002년에는 임단협 부결로 4개월 만에 사퇴하는 등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1대 위원장에 재당선되는 등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런 화려한 경력뿐만 아니라 그가 주장했던 ‘배일도식 노동운동’은 노동계 안팎에서 주목을 받았고 영향력도 있었다. 배일도 위원장의 5년 활동은 노동운동, 노사관계 측면에서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현장 동의 없는 새로운 노동운동 ‘실패’
‘노동운동의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강조하며 배일도 위원장은 지난 99년 위원장으로 당선됐다. 98년 IMF 이후 대대적인 구조조정 등 노-사, 노-정간 대립적 토대 속에서 배 위원장의 ‘노사 상생’, ‘무쟁의 선언’은 서울지하철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일약 주목을 받게 된다. 정부, 언론, 사측은 “새로운 노사관계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력에 경의를 표한다” 등의 표현을 쓰면서 각별한 애정을 보인 반면, 노동계 내에서는 “노동기본권을 상실한 어용, 노사협조주의”라는 극단적인 비난도 쏟아졌다.
그렇다면 배일도식 노동운동은 과연 무엇일까. 배 위원장은 지난 2002년 4월, 11대 위원장에 당선된 뒤 본지 인터뷰에서 “현 노동운동의 주류는 힘에 의한 대결이다. 계급 대립적 관점을 포함, 물리적 대결주의에 반대한다. 배일도식 노동운동은 ‘자율과 상생’이다. 시대 변화에 따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배 위원장을 서울지하철 노동자들은 5년 동안 지지했다.
하지만 배 위원장 당선과 노동운동 노선에 대한 지지는 분리해야 한다는 지적이 지하철 내에서는 우세하다. 조합원들의 선택이 ‘배일도 노선’의 정확한 이해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표면적으로 비춰지는 ‘안정과 실리’에 기대는 측면이 많았다는 것이다. 서울지하철 내 한 활동가는 “조합원들이 배 집행부에 대해 신뢰하기 보다는 불안해하고 있었다”며 “그동안 (배 위원장을) 견제해 달라는 뜻으로 역무 등 4개 지부 모두 ‘민주파’를 당선시킨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조합원들이 아직까지 과거 99년 4?19 파업 등 노조 투쟁방식에 지쳐 있는 상태였다”며 “배 위원장의 정치력으로 ‘피해를 덜 보고 싶다’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배 위원장이 ‘안정과 실리’를 담보하지 못하면 조합원들은 냉정하게 돌아설 것이며, 이번 12대 위원장 선거에서 증명됐다는 것.
실제 배 위원장이 새로운 노동운동 실현을 위해 야심 차게 추진했던 양대 노총 소속 지방공기업노조로 구성된 ‘전국지방공기업노조협의회(전공노협)’, 한국노총 소속 전력노조, 정투노련 등이 참여하고 있는 ‘공공부문 노조연대’ 활동은 조합원까지 포괄하지 못한 채 상층 중심의 움직임으로 그쳤다. 서울시투자기관 노사 대표와 서울시가 참여한 ‘노사정 서울모델협의회’(서울모델)도 대의원대회 인준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서 위원장만 주도적으로 나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 6.13 지방선거 김민석 후보(민주당)지지 선언, 대선 때 정몽준 후보(국민통합21) 지지 연설 등 정치적 행보도 ‘구설수’에 올라, 배 위원장의 새로운 노동운동 성격 자체를 모호하게 했다.
현 시스템에서 노사평화 가능한가.
‘노사상생’을 주장했던 배 위원장은 지난 2002, 2003년 잇따라 파업을 예고했으며 지난해 1월에는 결국 부분파업을 단행, ‘무쟁의 기록’이 깨졌다. 이러한 행보는 아무리 노조가 ‘대화와 협력’, ‘노사평화’를 원해도 현 노사관계 시스템에서는 어렵거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배 위원장도 지난해 1월 서울시 일방적 연장운행 철회 투쟁을 할 당시 “공사는 사장 임명권을 갖고 있는 서울시의 ‘눈치’를 보게 돼 노사가 자율교섭에 나설 수 없고, 서울시는 노사 합의 절차를 뒷전으로 하고 정책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며 “자율과 상생은 먼 나라 얘기인 것 같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2002년 행자부 지침 철회 투쟁 때도 ‘노사 자율교섭’이 침해당하고 있다며 비슷한 고민을 털어놨다. 결국 노-사-정간 파트너십을 위한 교섭 틀 등 제도적 조건이 확실히 보장되지 않은 이상, ‘노사평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실험’이 된다는 의미다. 이런 속에서 배 위원장의 ‘무쟁의 선언’ 등은 노동기본권을 사실상 박탈당한 속에서 자칫 사용자(정부)의 후원과 협조에 의존, 경영진(정부)의 의사결정에 종속당하는 ‘노사협조주의’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배 위원장은 그 동안 행자부 지침, 일방적 연장 운행 등 현안 문제를 형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금전’ 등 내용적으로 보완하는 형태로 풀어왔다.
정부가 노사관계에서 ‘대화와 타협’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가운데 배 위원장의 경험에 비춰볼 때, 노사갈등이 실질적으로 최소화되기 위해서는 대화 가능한 틀, 합의 사항 이행 등 그에 맞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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