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03-2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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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안)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 보기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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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운영자
 조회 : 3,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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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눈으로 세상 보기
하 종 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www.hadrea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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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와 사회에 대한 올바른 관점
2. 제도권 교육의 잘못 극복하기
3. 미래 사회 노동자․노동조합의 전망
4. 헌법과 노동기본권
5. 노동자와 경제
6. 노동자와 역사
7. 노동자의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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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와 사회에 대한 올바른 관점
세상을 다시 봐야 하는 이유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사실도 달리 보게 마련이다. 똑 같은 사실을 노동자는 노동의 관점으로, 경영자는 자본의 관점으로, 정치인은 권력의 관점으로 본다. 사실은 하나인데 설명이 세 가지이니 그 세 가지가 모두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관점이 옳은 것일까?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최소한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노동자들의 주장이 옳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하나의 사실에 대해 각각 다르게 주장하다가도 몇 년의 세월이 지나 노동자의 주장이 옳다고 밝혀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전교조' 의 합법화, '위험작업중지권'의 신설, '제3자개입금지'의 폐지, '복수노조'의 인정, 공무원의 단결권 인정 등이 모두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노동문제뿐만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짧은 기간 동안의 가장 놀라운 경제 성장을 자랑했던 박정희 정부의 '한강의 기적'에 대해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노동자의 저임금을 경쟁력의 기반으로 하는 그릇된 경제 정책이 언젠가는 우리나라를 빈 깡통으로 만들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었고 그 예언은 24년 후에 정확하게 적중했다. 전두환․노태우가 구속되는 데에는 15년의 세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아하, 이래서 노동자가 진보세력이라는 것이로구나' - 이론적으로 따지기 전에 현실이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역사와 사회를 올바로 보는 사람만이 올바른 전망을 세울 수 있다. 역사란 담당 주체가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해 가는 과정이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역사와 사회를 보는 노동자의 주장과 관점이 옳은 이유는 노동자들의 지식과 교양과 인품이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억압구조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발전과정과 사회의 정체성
우리나라 국민들은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불편하다고 불평을 하고 노동조합을 ‘집단이기주의’라고 비난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시민들이 불편을 감수하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존중하려고 애쓴다.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
역사 발전 과정은 사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봉건 해체 과정에서 시민 계급이 형성되고, 이들이 자본을 축적하여 물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자본주의로 진행하여 시민적 권리 의식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쌓여 왔다.
봉건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해체한 이데올로기의 기초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개념이었다. 시민혁명은 사회 구성원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평등하게 살아가기 위한 시민적 권리를 깨닫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라는 기형적 형태로 중세 사회가 해체되면서 갑자기 자본주의사회로 편입되었다. 역사 발전 과정에서 ‘조선’이라는 중세 사회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상실했던 것이다.
‘식민지’ 외에 우리 사회가 겪어야 하는 또다른 혹독한 조건은 ‘분단’이다. 식민과 분단이라는 이중의 악조건을 경험한 나라는 많지 않다. 남북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은 국익의 차원에서 당연히 고려되어야 하지만, 그동안 우리 사회는 ‘분단’이라는 상황을 실제보다 더욱 과장함으로써 기득권 세력이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는 데에 이용해온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노동자의 권리를 다른 나라보다 더 규제할 수 있는 이유를 합리화하는 데에 ‘분단’이라는 상황이 적절하게 적용되어온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2. 제도권 교육의 잘못 극복하기
제도권 교육과 언론의 역기능
시민적 권리의식을 함양하는 선진국 교육과정과 달리 우리나라의 제도권 교육에서는 노동조합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올바로 가르치지 않는다. 우리 국민들은 매스컴의 정보 전달이나 간접적인 사회 경험 등을 통해 오히려 노동조합은 뭔가 대단히 불순하거나 불온한 단체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선진국에서 보편화되어 있는 노동법, 노동운동, 노동조합 등에 관한 교육을 도외시하여 교육을 통한 시민 권리 의식 함양의 기회마저도 저버렸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장차 노동자가 될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에 대한 아무런 개념 정리도 없이 노동자가 된다. 대학에서 노동문제 강연을 들으러 온 학생들에게 그 취지를 물으면 “대학생들도 국민의 한 사람인데 노동문제를 이해해야지요.”라고 답한다. 그렇게 답하는 학생들의 얼굴에서 자신들도 곧 노동자가 될 거라는 것을 미리 짐작하는 기색은 없다. 노동자가 되거나 노동자의 부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학생들이 노동문제를 자신과 관계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상황은 우리 사회의 역사 발전 과정이 달랐다는 사실과 함께 제도권 교육과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결과이다. 노동조합은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비정상적 상황을 해소하는 중요한 준거 틀로서의 보편타당성을 갖는다. 이제는 노동조합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 때이다.
남구만의 시조 다시 읽기
우리 국민들이 입이 닳도록 외우는 시조가 있다. 조선 후기에 영의정을 지냈던 남구만(南九萬)의 시조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아이들 참고서에 보면 이 시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농촌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을 훌륭하게 묘사한 시조입니다" "농가의 부지런한 생활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백성들에게 근면하고 성실하게 일하라고 강조하는 계몽적인 내용입니다" 지금도 학교에서는 어김없이 그렇게 가르치고 시험에 나오면 그렇게 써야 정답이다.
이 시조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을 한번 상상해보자. 양반이 아랫목에서 느즈막이 잠을 깨었다. 해가 벌써 중천에 떠있고 종달새도 우짖고 있다. "아이쿠, 내가 늦잠을 잤구만. 그런데, 저 나이 어린 머슴 놈도 아직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놈이 오늘 언덕 넘어 넓은 밭을 전부 다 갈아야 하는데, 그놈도 아직 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도 덜도 없이 바로 그와 같은 장면이다.
같은 상황을 머슴의 입장에서 한번 보자. 매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곤죽이 되게 일을 하다가, 황토바닥에 거적때기 한 장 깔려있는 머슴방에 와서 그냥 쓰러져 잤을 것이다. 새벽이 올 때마다 이 나이 어린 머슴의 가장 큰 소원은 조금이라도 더 자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머슴의 '관점'으로도 같은 상황을 '농촌의 아름답고 목가적인 풍경'이라고 한가롭게 노래할 수 있었을까? 오로지 머슴의 관점만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 반드시 그렇다고 강요할 맘은 없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올바른 교육이 되기 위해서는...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도 한 번 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이 시조에 대해서 백 번쯤 설명할 때 단 한번이라도 "같은 상황을 머슴의 입장에서 한번 볼까요?"라고 가르쳤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가끔은 머슴의 입장에도 서 볼 수도 있고, 이 세상을 올바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그 중요한 사실을 천 번에 한번, 만 번에 한번도 설명하지 않는다. 국민의 대부분이 머슴이거나 그 가족으로 살아가는 사회에서 단 한번도 ‘머슴의 관점’으로 우리 사회를 설명해주지 않는다. 한 줌도 안 되는 ‘양반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가르친다. 그게 우리나라 제도권 교육이다. 어릴 때부터 시작되어 평생동안 지속되는 그 ‘사기’는 몇일 밤 동안 얘기를 해도 모자랄 만큼 많다.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
이와 같은 예는 무궁무진하게 많다. 우리는 모두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거북선을 과연 이순신 장군이 혼자 설계하고 만들었을까? 거북선을 설계하고 직접 만든 사람들은 아마 훌륭한 기술자들과 목수들과 뱃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훌륭함을 깎아내리자는 것이 결코 아니다.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이라는 우리의 훌륭한 역사에 대해 가르칠 때 백 번에 한 번쯤이라도, 밤을 밝히고 연구하면서 설계를 수십번 이상 뜯어고쳤을 기술자들의 노력과 망치로 두드려 그 배를 만들었을 노동자들의 땀과 수고를 같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교육을 통해 역사에 대한 올바른 관점을 갖추는 것이 가능하다. 국민의 대부분이 기술자이거나 노동자이거나 그 가족들로 살아가는 사회인데 한번도 그 관점으로 우리의 역사를 볼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는다.
독립운동과 민족자결주의선언과 러시아혁명
한 가지만 더 말해 보자. 우리는 모두 1919년에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을 비롯한 우리의 독립운동이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선언’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배웠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친다. 그런데 3․1운동이 일어나기 불과 1년 5개월 전에 인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긋는 사건이 우리나라 이 작은 땅이 붙어있는 바로 위의 큰 땅덩어리에서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러시아 10월 혁명이다. 그 혁명의 옳고 그름을 떠나, 그 사건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었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누어버렸고 자본주의 시장의 45%가 한꺼번에 떨어져나갔다. 그 영향이 옳은 영향이든 그른 영향이든 인류 역사를 통틀어 한꺼번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거의 없었다. 그로부터 1년 5개월 후에 그 바로 밑에 붙어있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3․1운동이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3․1운동을 이야기하면서 러시아 10월 혁명을 쏙 빼 버린 채, 바다 건너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선언’만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음모의 시스템
교사는 우리 사회 제도권 교육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다. 교사들이 일정 부분 참여해온 그 '음모의 시스템' 속에서 수십 년을 찌들어 살아온 한국통신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지를 나몰라라할 수밖에 없다. '한번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입장에 서 보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우리 사회에서 훈련받은 캐리어 정규직 노동자들이 캐리어 사내 하청노조를 무참하게 짓밟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수십년 동안 찌들어온 그 음모의 시스템을 분쇄해야한다. 노동자들이 그 '가면의 거짓'을 뚫고 솟아나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해야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해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에게 가르쳐야만 한다. 세상에는 양반도 살고 있지만 머슴도 살고 있다는 것을, 단 한번도 머슴살이를 해보지 않았거나 가족 중에 머슴이 없더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세상을 구조적으로 보자
노동자의 주장이 옳은 이유는 노동자들이 올바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관점이 옳은 것은 노동자들의 지식과 교양과 인품의 수준이 높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 구조의 문제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숲에 보면 키가 큰 나무가 있고 키가 작은 나무도 있다. 키가 큰 나무는 그 나무의 품성이 아무리 훌륭해도 키가 작은 나무에게는 햇볕을 가리는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키 작은 나무가 공평하게 햇볕을 받기 위해서는 자기의 키를 크게 키우거나 키가 큰 나무의 햇볕을 가리는 가지를 쳐 낼 수밖에 없다. 키 작은 나무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노력할지라도 숲 전체가 더욱 평등해지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과 노동의 대립구도가 바로 그것이다.
구조적으로 보아야 사물을 옳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문제를 이렇게 그 주변의 사회적 관계와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것을 ‘구조적 인식’이라고 한다. 인간 개인의 문제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 내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인 양 가르치고 사람들이 주로 인간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조장한다. 사람들의 의식을 이 세상을 구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조율한다. 개인의 성실한 노력과 인격적 완성만으로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뚫고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훈련시킨다. 주변에 죄 없이 고통받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눈 질끈 감고 자기 혼자 아름답고 고운 생각을 품으면서 ‘자아 발견’을 하면 그것이 올바른 삶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의 특권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이 가지는 특권이란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은 그러한 특권을 도저히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자본가가 자신과 가족만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하고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역사를 후퇴시키는 것이다. 언론을 매일 장식하는 대형 사건들이 대부분 그런 권력과 자본의 이기적 노력의 결과들이다.
반면에, 노동자들의 집단 이기주의나 ‘사익’을 추구하는 활동일지라도 긴 호흡으로 보면 그 ‘사익’이 모여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공익’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노동자 계급이 모여서 만든 조직이 바로 노동조합이다. 조합원 개인이 하는 작은 활동일지라도 그것은 기나긴 역사 속에서 진행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역사의 기관차’이다.
3. 미래 사회 노동자․노동조합의 전망
17세기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17-18세기 메뉴팩쳐 시대의 수공업적 노동자는 '장인'이었다.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지금의 대학교수 급이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시의 노동자는 숙련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고(거의 평생이 걸리기도 했다), 일하는 모습도 지금의 노동자와는 전혀 달랐다. 나중에는 일주일에 4일 정도만 일했고, 점심 시간에 아내가 점심을 싸 오면 점심 먹느라고 두어시간씩 소비하거나 심지어 잠자리를 함께 하기도 했다. 파업의 효과가 지속적으로 발휘되고 있었으니, 새삼스럽게 단체행동을 할 필요도 없었다. 식민지 경제가 상품의 수요를 전세계적으로 창출하였으나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일손은 턱없이 부족했으니 노동자의 특권은 더욱 강화되었다. 당시의 노동자는 도시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날품팔이 대중 위에 군림하는 특권층이었다.
이와 같은 노동자의 특권은 기계가 생산에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파괴되었다. 자본가와 노동자(수공업적 노동자)의 사활을 건 이해관계에 의해 비로소 기계가 생산에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수공업적 노동자의 특권을 분쇄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기계를 생산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유형의 자동화, 기계화는 19세기에 이르러 섬유산업, 방앗간 등에서 거의 완벽한 완성태에 도달했고, 섬유노동자, 방앗간 노동자들을 쓸모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우리가 아는 '기계 파괴 운동'은 이에 대한 특권층 수공업적 노동자의 저항이었다. 당시 기계를 파괴했던 노동자는 결코 역사 속에서 헐벗고 굶주려 온 노동자 대중이 아니었던 것이다.
노동조합의 출발
그와 같은 특권층 노동자들이 조직하기 시작한 것이 노동조합(Trade Union)이었다. Trade Union - 이 말 속에 '노동'과 관련된 의미는 없다. 달갑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노동조합의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노동조합은 탄생하면서부터 "특권을 상실하는 계급이 그 필요성을 인식한다"는 성격을 숙명처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특권층 노동자는 존재했다
대다수 수공업적 노동자의 특권은 생산에 기계가 투입되면서 분쇄되었으나 여전히 특권층 노동자는 존재했다. 누구였겠는가? 다름 아닌 '기계를 만드는' 노동자들이었다. 기계의 수요가 대량으로 요구되었으나, 기계는 여전히 소수의 숙련된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막대한 수요에 비해 공급은 태부족이었다.
이 고숙련 노동자들의 특권은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기계를 생산하는 기계'가 보급되거나 또는 기계를 생산하는 노동자를 기계처럼 부려먹는 공정이 개발되면 그들의 특권 역시 막을 내릴 것이었다. 그러나, 한 장소에서 한 가지 원료로 완제품까지 뽑아내는 섬유산업, 정미산업 등과는 달리, 수만개의 부품들이 여러곳에서 별도로 제작되어 나중에 공장에서 조립되는 기계 생산 공정은 19세기 산업혁명 완성 후에도 오랫동안 기계화, 자동화되지 못했다. 따라서, 숙련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간섭에 대해 자신들의 숙련된 수공 기술을 무기로 능히 저항할 수 있었다.
이 숙련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에는 격변이 수반 되었다. 기계 생산 공정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기계처럼 일하도록 강제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테일러 포디즘(Tayler-Fordism)이었다. 이 테일러 포디즘이 전 세계를 관철하는 데에는 50년의 세월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필요했다.
정보화 사회의 노동자
우리가 말하는 이른바 '정보화 사회'로의 이행도 이러한 변화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다. 정보화 사회를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자. 지금의 고숙련 노동자들은 누구인가. 석사․박사 학위 노동자, 프로그래머, 영화를 포함한 멀티미디어 산업 종사자, 프로듀서․기자 등 언론 종사자, 벤처기업 노동자, 펀드 메니저, 연봉 1억이 넘는 골드칼라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착취당하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는 이러한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의 대량 수요를 창출하는데, 이러한 고숙련, 고학력 노동자들의 특권은 점차 빠른 속도로 소실되고 있다. 하나의 작은 예로, Pan Opticon System('전감시체제' 또는 '범감시체제'로 번역하면 될 듯하다.)은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일하는 노동자를 완벽하게 통제한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직원 한 명당 하나의 사무실을 갖고 한 없이 자유롭게 일하는 듯 보이나, 빌 게이츠는 한국에 와 있는 동안에도 컴퓨터 통신망을 이용하여 마이크로소프트 미국 본사 말단 사원의 업무까지 직접 지시 감독할 수 있었다지 않은가. 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두뇌 노동자이든 육체 노동자이든, 글자 그대로 생산 과정 전체가 '유리처럼 투명한 공장'이 되는 것이다. 이 '유리처럼 투명한 공장'을 실현시키기 위한 노력은 농촌의 읍사무소에서부터 대재벌의 빌딩까지 관철하지 않는 곳이 없다.
고학력․고숙련 노동자의 증가
정보화 사회가 진전될수록 전문직종, 고학력, 비생산직 계층의 사회적 분포도는 더욱 넓어진다. 그러나 숙련된 노동자의 권력은 상승되지 않고 있으며, 그럼에도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고숙련을 요구받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옳겠는가. 분명한 것은 이 기묘한 현상이 바로 새로운 정보화사회 노동운동의 토대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이 새로운 현상에 조응하면서 계속 발전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시대 노동조합의 전망
정보화가 진행되고 심화되면서 더욱더 전문화되고 개인화되는 시대에 과연 집단성을 띤 노동 운동은 가능한 것인가? 가능하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가능하지 않다면 프랑스 판사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한 것을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구성원의 가치관은 개인주의화되고 파편화되어 조직, 집단, 단체 등ꡐ우리(We-ism)' 개념을 거부한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세계적인 차원이건 국내적 현실이건, 화이트 칼라의 노동조합 지향성은 갈수록 상승 곡선을 그린다는 점이다.
얼마 전까지 은행원은 통념상 화이트 칼라의 전형이었다. 안정된 직종이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인이었다. 그러나 최근 금융 시장의 악화로 그들은 신분상의 위기를 느꼈으며 -특권 상실을 절감했으며- 끝내는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두 번의 총파업투쟁을 치렀다.
언론계의 노동운동도 왕성하다. 한 계층의 가치관을 재단한다는 것이 위험 천만한 일이지만, 그 분야의 종사자만큼 전문성과 선민 의식을 짙게 지니는 계층도 없다고 할만큼 그들은 지극히 자존적이다. 그러나 부당한 해고, 부당한 인사, 부당한 명령 앞에서 ꡐ자존(pride)ꡑ만큼 취약한 것도 없다. 그리하여 방송 언론 종사자들은 언론인으로서의 가치 있는 삶을 위해 분연히 파업의 최일선에 뛰어든 것이다. 이제 ꡐ화이트ꡑ와 ꡐ블루ꡑ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부당함에 대항하는 올바른 선택 - 이것만이 실질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우리나라 법원 판결의 일관성이 유지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는 판사들이 놓인 업무 상황, 쉽게 말해서 폭주하는 업무량을 파악해야 이해가 가능하다. 한 판사에게 할당된 수많은 사건과 그 사건들이 몰고 오는 산더미 같은 자료 속에서, 담당 판사가 초인이 아닌 바에야 어찌 명백한 판단 근거를 제대로 마련할 수 있겠는가? 합의체를 구성하고 법리적으로 천착하고자 해도 업무량이 그 어떤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조합의 목적이 ꡐ생존권 확보ꡑ일뿐만 아니라 가치있는 삶의 구현이라고 할 때, 판사들 역시 ꡐ산더미ꡑ 속에서 가치있는 생존의 숨구멍을 트고 싶었던 것이며, 그것이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에 법이 보장한 바 노조의 깃발 아래 단결한 것이다. 법복의 권위? 빛나는 지성? 판결의 엄숙성? 이런 가치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차라리 그런 가치들을 좀더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노조라는 언덕에 의지했다는 것이다.
4. 헌법과 노동기본권
헌법과 노동기본권
노동기본권은 헌법과 법률 이전에 노동자가 갖는 당연한 권리이며 인권이다. 이것은 사회체제를 초월한 보편적․절대적 권리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불변의 권리이다. 노동3권과 관련한 헌법 제33조 [근로자의 단결권 등] 제①항 "근로자는 근로조건의 향상을 위하여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 체행동권을 가진다."는 규정은 국가가 노동자의 노동3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지, 헌법의 규정에 의해 비로소 노동자에게 노동3권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헌법 제33조의 규정이 없더라도 노동자의 노동3권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진국들 중에서는 헌법에 따로 노동3권을 보장하는 명문 규정을 두지 않는 경우도 있다. 지극히 당연한 자연법적 권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헌법 제32조 [근로의 권리․의무 등, 국가유공자의 기회우선] 제①항 "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하여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 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하여야 한다."는 규정이 없더라도 인간은 누구나 살기 위해 일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과 같다.
다만 헌법에 노동기본권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은 첫째, 그것이 국가의 의무임을 명시하는 것이고, 둘째, 사회 각 계급이 각각 다른 입장과 세계관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노동법의 내용을 주장하거나 해석을 달리할 때 그 판단과 해석의 기준을 헌법에 규정하였으니 근거로 삼으라는 것이고, 셋째, 전체 국민은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조합의 이야기를 헌법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노동3권의 내용
'단결권'은 노동자들이 자본가와 대등하게 교섭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단체교섭권'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개별적 교섭 대신에 노동조합을 통하여 집단적으로 교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단체행동권'은 노동자들이 요구가 관철되지 않을 경우에 집단적으로 작업을 거부하는 등 실력 행사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 세 가지 권리는 '통일적 권리'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단체교섭권이 없는 단결권은 무의미한 것이며, 단체행동권의 보장이 없는 단체교섭권이란 종이 호랑이와 같다.
노동3권은 통일적 권리이다
파업은 법률적으로는 엄연히 ‘노동 3권’에 속하는 ‘단체행동권’의 일부이다.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노동 3권 -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이 세 가지는 서로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어 따로 구분하기 곤란한 경우가 많다. 단체교섭권이 없는 단결권은 무의미한 것이며, 단체행동권의 보장이 없는 단체교섭권이란 종이 호랑이와 같다. 이러한 노동3권의 연관성을 ‘통일적 권리’라는 중요한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단체교섭을 전제로 하지 않는 노동조합은 그 존재가 무의미하고, 단체교섭은 단체행동을 전제로 할 때에만 자본과 노동 사이에 힘의 균형을 갖추고 진행될 수 있다. 단결권은 단체교섭권에 의해서 담보되고 단체교섭권은 단체행동권에 의해서 담보된다. 지난 노동법 개정에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하나로 묶어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으로 틀을 갖춘 것도 경계가 모호한 노동 3권 모두를 하나의 법률로 규정하자는 취지이다.
노동3권을 법률로서 보장하는 또 다른 이유
권력과 자본이 노동조합을 그토록 혐오하면서도 어째서 세계의 모든 국가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는 권리를 법률로서 보장하고 있는 것일까? 헌법으로 노동기본권을 규정하고 각종 특별법으로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길게 설명할 것도 없이, 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노동조합의 활동이 사회 전체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최근세의 인류역사가 200년 넘는 과정을 통해 그것을 검증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란 사회의 발전에 아무런 보탬이 안 되는 그야말로 “집단이기주의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불학무식한” 조직이라면 그 권리를 법률로서 보장할 리가 없다.
노동자들의 활동이 사회에 유익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노동자들의 지식과 교양과 인격의 수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된 억압구조가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강제하기 때문이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고대사회 '해방 노예'의 관점이 옳았고, 중세사회 '해방 농노'의 관점이 옳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들의 관점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가 가지는 계급적 성격은 한 마디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노력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계급은 그러한 특권을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자본가가 자신과 가족만의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신문을 장식하는 대형 사건들은 대부분 권력과 자본의 이기적 이익을 위한 노력의 결과들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 파업의 목적이 오로지 “내 일자리를 지키겠다”거나 “한 푼 더 받겠다”는 '집단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결국은 그 노력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하물며, 노동조합이 사회 개혁을 위한 이타적 목표들을 추구하는 바에는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다.
노동조합이 없다면 이 세상은 소수의 특권을 누리는 세력들만의 이해가 무자비하게 관철되는 심각한 불평등구조를 벗어날 방법이 없다. 노동조합은 자신들이 소속돼있는 사회의 불평등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가장 올바르게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노동조합은 지금까지 2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그 역할을 수행해왔다. 사회의 특권세력이 노동조합을 혐오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우리 사회 ‘악의 축’들에게 노동조합은 가장 확실한 ‘적’이 되는 것이다.
대우자동차 노조의 파업이 "정부와 기업의 잘못된 구조조정 정책에 쐐기를 박는다"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거나, 방송 노동자들의 파업이 "민주언론 쟁취"라는 고상한 목표가 아니라 오로지 "일자리를 지키겠다"거나 "한 푼 더 받겠다"는 '집단 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그러한 노력이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사익'이 모여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공익'이 되는 것이다. 물론 노동자들이 오로지 자신들의 이기적 이익만을 추구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점들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노동자 일반의 선택’이 ‘권력과 자본 일반의 선택’보다 우선하는 역사적 당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사회적 범죄행위처럼 보는 시각이 팽배한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5. 노동자와 경제
경제를 알아야 세상이 바로 보인다.
노동자가 경제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경제를 알아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를 모르면, 권력과 자본이 줄기차게 주장했던 ‘고임금 망국론’이 어째서 새빨간 거짓인지 그 진실을 볼 수가 없다. 경제를 모르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왜 잘못된 정책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 경제를 모르면, 노동자의 월급봉투가 매년 두꺼워져도 어째서 우리의 삶은 매년 더 가난해지는 것인지 그 진실을 볼 수가 없다. 경제를 모르면, 어째서 인류의 역사가 원시시대부터 현대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그와 같은 과정을 겪게 되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역사와 경제
지금까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려는 많은 노력의 결론은 “경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해답을 구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이 ‘프랑스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변호사나 유복한 상인이나 시골 귀족의 상처받은 허영심이라든가 말 많은 철학이 아니라, 2천5백만의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굶주림, 추위, 괴로움... 이런 것들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혁명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거룩한 이념은 굶주림의 해결이라는 절박한 문제에 뒤따라 나온 자연스러운 결론인 것이다.
역사와 경제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석을 애써 부인하려는 노력이 최근까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중세시대에는 역사는 초월적 존재인 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에 불과했고, 20세기초까지도 역사는 ‘위인의 전기’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탁월한 한 역사학자조차 그들의 동료 역사학자들이 “역사상의 위인을 사회적 및 경제적 허수아비처럼 취급하고 그 위인들에 대한 대량살육을 자행했다”고 비난했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그와 같은 사회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경제적 조건이다. 역사는 훌륭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 인간들이 생활해 온 모습이고, 그들의 경제적 욕구가 반영되어 온 과정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최근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매년 하나씩 출현한 통치 이데올로기들... ‘신경제’ ‘국제화’ ‘세계화’ ‘신노사관계구상’ ‘신자유주의’ 이 모든 통치이념들이 모두 경제 문제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것들이었다.
경제를 분석하고 전망한다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는 다양한 시각과 방법이 사용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는 현재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가, 그 특성은 우리나라 국민, 특히 우리 노동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세계 자본주의 환경 속에서 그 특성은 어떻게 변화 발전할 것인가를 옳게 규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겠으나, 우리 노동자 활동의 방향과 목표를 설정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일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같은 현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 하는 것이다. 똑 같은 한국 경제의 실태를 자본가는 자본가의 입장으로, 노동자는 노동자의 입장으로 보게 된다. 사실은 같을지라도 그 평가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장래의 전망을 옳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관점에서 정확하게 이해한 쪽만이 사업의 방향을 옳게 세우고, 그 전망을 달성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객관'은 ‘객관'대로 파악해야 노동자에게 유리한 정책을 수립할 수 있다. 그럴 때 ‘노동자의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린다면, 장기적으로 역사 변화를 바라보는 눈, 궁극적으로 민중의 승리라는 믿음에서 집어내는 현실 변화의 맥락 잡기... 이런 것일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의 특권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만이 가지는 특권이란, 쉽게 말하면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할지라도 사회 전체를 유익하게 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자본가 계급은 그러한 특권을 도저히 가질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자본가가 자신과 가족만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그 노력은 사회 전체를 해롭게 하고 역사를 후퇴시킨다. 신문을 매일 장식하는 대형 사건들이 대부분 그런 노력의 결과들이다.
노동자들의 요구가 ‘집단 이기주의’였다고 해도 괜찮은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사익’이 모여 결국은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고 경제구조를 튼튼하게 만드는 ‘공익’이 되는 것이다. 노동자 개인이 하는 작은 활동일지라도 그것은 기나긴 역사 과정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역사의 기관차’이다.
6. 노동자와 역사
역사 발전의 법칙
선사시대를 빼고 실증적 기록이 남아있을 때부터 따지면 인류의 역사는 대략 얼마나 되는 것일까? 성경까지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할 경우 기독교의 출발이 되었던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1300년경이었으니 모두 2천5백년쯤 되었다고 보자.
2천5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류 역사는 신기할 정도로 한쪽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인류 역사도 줄기차가 한쪽 방향을 지향했다. 그 방향은 2천5백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중세 사회에서는 농노가 노동을 담당했다. 그들의 생활이 얼마나 어려웠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생략하자. 다만, 고대의 노예는 잘게 부숴져서 연못의 붕어밥이 되기도 했고, 중세의 농노는 결혼 첫날밤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는 권리를 영주에게 받쳐야 했다는 것 정도만이라도 알아두자. 그 시대에는 그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관이었다.
고대 노예의 생활에 비하여 중세 농노의 생활은 한결 그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었고, 중세의 농노에 비하여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 생활 역시 그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을 직접 담당했던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어 온 것에 비하면 중세의 영주는 고대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오히려 축소되었고,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 역시 중세의 귀족보다 그 자유와 권리가 축소되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며 사는 계급이 있고,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이 있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는 사회 계급은 그렇게 나뉘어져 있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그 시대의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점차 확대되는 방향으로, 편하게 놀고먹는 계급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는 방향을 진행되었다. 그 방향이 5천년 동안 바뀌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시대의 노동을 직접 담당하고 있는 주체의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이 역사의 진행 방향이었고, 그 진행 방향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노동 해방’을 주장하는 우리의 관점이 옳은 것은 고대사회 ‘해방 노예’의 관점이 옳았고, 중세사회 ‘해방 농노’의 관점이 옳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가치 생산을 담당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가 확대되고 그 상대되는 계급의 권리와 자유는 축소되는 과정 - 그것이 바로 역사의 진행 방향이다. 때로 전진하고 후퇴하기도 하지만 조금만 길게 봐도 결국은 올바른 관점을 가진 사람만이 올바른 전망을 세우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역사는 담당 주체의 세력 확대 과정이다”라고 표현한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자신있게 반대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방향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노예제도가 문명사회에서 철폐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똑 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 나타나면 역사가 잠시 수십년쯤 뒤로 후퇴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지금은 신자유주의라는 망령 때문에 역사가 잠시 주춤거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역사 담당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
우리가 또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자유과 권리가 확대되는 과정에는 그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시대 노예의 피 어린 역사는 영화 ‘스팔타쿠스’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고, 중세 시대 농노의 해방 전쟁은 ‘토마스 뮌쳐’ 등에서 그 모범을 본다. 역사의 강물은 그렇게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 가능했다.
노동자가 역사를 똑바로 이해하는 것은 역사의 강물을 밀고 가는 활동에 자신감을 준다. 지금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끝내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이 노동자의 인생을 보람있게 만드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다. 역사와 경제를 이해하는 올바른 철학이 우리들 내딛는 발걸음에 힘을 더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합법칙성
노동운동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침체국면에 빠지기도 하고, 고양국면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정체되기도 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도 한다.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이것이 노동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이다. 언제나 동일하게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고비를 겪으면서, 마치 고개를 넘는 것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발전한다는 것이다.
외형상 침체국면은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요구와 불만이 축적되는 시기이다. 이러한 불만과 요구는 언젠가 반드시 표출된다. 침체 가운데서도 노동운동 역량은 쉬임없이 고양․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정체는 반드시 비약적 발전을 준비한다. 축적된 불만은 다음의 고양국면을 향해서 나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어려울 때는 버티는 쪽이 이긴다”고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침체국면을 지나 노동운동이 비약하고 고양되는 시기가 되면, 조직은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고, 투쟁전술이 광범위하게 구사되며, 정치적인 투쟁의 수준이나 이념도 급속하게 발전한다. 87년, 88년의 노동자 대투쟁과 96년말과 97년초를 뜨겁게 달군 총파업투쟁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노동운동의 발전은 침체와 고양, 정체와 비약, 패배와 승리를 거듭하면서 역사를 이끌고 가는 기관차가 되는 것이다.
7. 노동자의 세계관
변증법적유물론과 사적유물론
변증법적유물론, 유물변증법, 사적유물론, 유물사관 등의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는 위의 단어들이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나름껏 정리해보면, 변증법적유물론(유물변증법)은 쏘비에트의 볼셰비키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공식화한 철학으로서 그 내용이 여러 차례 수정되기도 했고, 그 변증법적 유물론의 역사에 대한 적용이 사적유물론(유물사관)이다. 공산권 내부와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철학교조로서의 지위는 상당 부분 상실했으나, 그 철학 개념들은 아직도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선택적으로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개념들의 정의를 새삼 살펴보는 것은 그 내용을 교조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제도권 교육 속에서 지나치게 경원시됨으로써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개념들을 한번 되짚어봄으로써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취지이다.
변화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변화하여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쉽게 눈에 보이는 변화도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사물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근본적인 성격의 변화가 없이 일정한 상태를 유지하는 시기도 있지만, 사물의 이러한 정지상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정지한 상태처럼 보이는 사물도 그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책상도 아주 느린 속도로 썩거나 마모되어 가고 있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바위산도 바람과 비와 스스로의 무게로 인해 서서히 마모되다가 언젠가는 계곡으로 구르고 또 굴러서 바닷가의 모래가 되기도 한다.
“변화야말로 변할 수 없는 만물의 실상”이라는 사상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치 않은 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만물은 다 생성(生成)한다. 만물은 흐를 뿐 어떠한 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다. 만물은 이루어진 것이며,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무 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오직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삶은 변화하고 있다.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다.”
변증법
사물의 본질은 운동이며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진리를 깨닫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광범위하게 승인된 방식들 중 하나가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본래 그리스의 대화술․문답법으로부터 출발했다. 대화할 때 서로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합의를 이루는 과정을 상상해보면 변증법적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했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이 서로 부딪침으로써 합(合)의 단계로 발전한다. ‘정’과 ‘반’이 통일된 단계인 ‘합’은 동시에 새로운 ‘정’이 됨으로써 발전이 지속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이론을 예로 들자면, 하나의 운동이론이 주장되면(정) 그 이론의 결점을 지적하는 이론이 주장되어(반) 갑론을박하다가, 두 이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이론으로 정립되는(합)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모순
모(矛)는 창이고 순(盾)은 방패다. 이렇게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관계를 모순이라고 한다. 사물은 수많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밝음과 어두움, 건강과 질병, 선과 악, 배부름과 굶주림... 물을 예로 들면, 물분자는 서로 흩어지려고 하는 힘(분산력)과 모아지려고 하는 힘(응집력)이라는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열을 가하면 분산력이 커져서 증발하고, 온도를 낮추면 응집력이 커져서 얼음으로 변한다. 물에는 이렇게 두 가지 대립물이 서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태를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한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변화가 바로 운동이다. 운동이란 모순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다. 사회운동이 올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순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과제를 올바로 설정하고 활동 계획을 세우고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효과적인 실천할 수 있다.
모순은 사물의 내부에도 있고(내적 모순), 외부에도 있다(외적 모순).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한국 사회 내에 존재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내부의 모순이고, 미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 받는 영향은 외부의 모순이다. 노동조합을 예로 들면, 한 사업장 안에서 노동조합과 회사의 관계는 내부의 모순이고, 다른 외부 노동단체의 지원이나 공권력의 간섭으로 생기는 관계는 외부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노선에 따라 내면적 요인가 외면적 요인 중 어느 하나가 더욱 강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변화의 근본 원인은 내적 모순”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주장도 있다. 분명한 것은, 사물이 발전하는 데에 있어 이 둘은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 철학에서는 내면적인 것, 즉 내적 자기모순의 운동에 따른 변화의 발생을 더 기본적 요인으로 본다.
대립
모순된 관계는 서로 대립한다. 우리는 사물에 존재하는 대립을 냉정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대립을 그냥 인정하고 가만히 있다면 아무 발전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물은 대립을 극복하고 해결하면서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라는 속담처럼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발전도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변화가 없는 삶과 사회는 침체된다.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하여 다른 무엇이 된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집단의 대립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지고 이윤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본가’ 집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비를 버는 ‘노동자’ 집단의 대립이 기본 축을 이룬다.
이처럼 “만물은 대립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사상 역시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물은 대립을 통하여 발생한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왕이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조화가 아니라 실은 그 조화 속에 들어 있는 대립물 사이의 긴장이고 투쟁이다."
"병이 있기에 건강은 좋은 것, 악이 있기에 선은 좋은 것, 배고픔이 있기에 포만이 좋고, 피곤함이 있기에 휴식이 좋은 것이다."
사회의 발전을 대립물 사이의 갈등으로 설명하는 철학은 근대에 이르러 급조된 것이 아니라 수천년 인류 철학사의 한 전통이었다.
부정
‘부정’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상태는 최상의 상태가 아니니 더 낳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다. 세상을 불신하고 ‘아니오’라고 부정하기만 하면 자기 자신이 계속 존재하고 유지되는 정체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사물을 부정하는 태도는 진실을 깨닫는 데에 매우 유익하다. 현실이나 자신의 한계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헤겔이 “부정이 없다면 발전도 고양도 없다”고 말할 때의 부정을 그래서 ‘긍정적 부정’이라고 한다.
노동운동이란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면서 부정적인 입장과 태도를 갖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대안을 천명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노동운동은 체제에 대한 가장 과감한 부정의 세력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지양
낡은 것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는 변증법적 부정의 과정을 ‘지양’이라 한다. 독일어로 ‘지양’이란 단어는 1) 폐기하다, 2) 보존하다, 3) 고양시키다 등 세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
현존 질서를 ‘폐기한다’는 뜻에서의 지양은 변증법 철학이 매우 변혁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변증법에서 많이 거론되는 “낡은 것의 소멸과 새로운 것의 형성”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낡은 것을 폐기하는 것 없이 새로운 것은 형성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 모름지기 새로운 상황으로 도약하려는 자는 우선 낡은 것을 지양, 즉 폐기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뜻을 이룰 수가 없다.
‘보존한다’는 뜻의 지양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이 주장하는 ‘노동 해방’은 자본주의의 전면적 부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발달한 긍정적인 것 - 첨단 과학기술이나 높은 생산력, 개인의 자유와 창의력 - 들은 모두 보존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고양하다’는 의미의 지양은 사물을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린다는 뜻이다. 부정이 있는 곳에 고양이 있다. 부정으로서의 지양은 그것을 폐기함과 동시에 좋은 면들을 보존하면서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지양’의 과정은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활동가의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혁신을 통한 실천이나 동지에 대한 비판도 하나의 부정이다. 우리가 다른 동지들을 비판하는 것은 더욱 올바로 인식하고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비판에는 애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다른 동지가 갖고 있는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요소는 살리면서 그의 잘못된 생각이나 실천을 바로잡는 비판이 되어야 한다. 비판과 비난이 다르다는 것을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업을 평가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업이든지 좋은 면은 살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태도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노동조합 간부도 개인적으로 ‘지양’의 과정을 밟는다. 간부라는 자신의 조건과 입장을 일단 부정하고 조합원의 입장에 서서 요구를 파악한 뒤 다시 그 입장을 부정하여 책임 있는 노조 간부로서 대중의 요구와 조건에 입각한 방침을 세워 실천하는 과정이 바로 ‘지양’이다.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작은 양적 변화가 점차 쌓이면 결국 한계를 무너뜨리고 근본적인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법칙이 양질 전화의 법칙(변화의 형태에 관한 법칙)이다. 물을 예로 들면, 열을 가해 온도를 높이면 점차 분산력이 높아지는 현상이 축적되다가(양적 변화) 그 변화가 계속되어 온도가 100도에 이르면 그때는 액체와 전혀 다른 성질의 기체(수증기)가 돼버리는 것(질적 변화)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양적인 변화만을 생각하면 조합주의나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발전하지 않는다. 노동조합 활동 경험이 싸이면 그때는 노동운동을 정치 세력화한다든가 하는 새로운 질적 변화가 필요하다. 반대로 성실한 노력을 꾸준히 하지도 않으면서 질적인 변화에만 집착하면 한 방에 모든 일을 해치우려는 조급증에 빠지게 된다. 질적인 변화를 내다보면서 꾸준히 양적인 변화를 이루어나가는 태도와 함께, 양적인 변화가 어느 수준에 달했을 때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질적인 변화로 바꾸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 사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의 힘이 세지면 노동자 권익이 점차 신장되다가(양적 변화) 노동자의 힘이 자본가보다 압도적으로 커져서 노동자 중심 정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법과 제도를 갖는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질적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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