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04-03-27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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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삶과 철학
하 종 강 /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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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와 사회에 대한 올바른 관점
2. 노동자의 인간관
3. 노동자의 세계관
4. 노동자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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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와 사회에 대한 올바른 관점
세상을 보는 각각 다른 관점
똑 같은 사실을 노동자는 노동의 관점으로, 자본가는 자본의 관점으로, 권력은 권력의 관점으로 본다. 같은 사실에 대한 각각 다른 설명들이 똑 같은 점수를 받는 정답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누구의 관점이 가장 옳은 것일까? 우리들은 노동자니까 당연히 노동자의 관점이 옳다? 그러나, 그래서 옳은 것은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역사가 심판하는 것이다.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누구의 주장대로 세상이 바뀌는지 보면 된다.
노동자의 철학이 따로 있나
‘노동자의 철학’이란 말을 들으면 자칫 ‘노동의 철학’이 따로 있고 ‘자본의 철학’이 따로 있고 ‘권력의 철학’이 모두 따로 있는데 우리는 노동자이니 그 중에서 ‘노동자의 철학’을 선택하겠다는 것으로 잘못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다. ‘노동자의 철학’이란 ‘노동자가 알아야 할 세상의 가장 올바른 철학’이란 뜻이다.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진리라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이다.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노동자 계급의 권익을 옹호하는 것이 바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 역사를 옳게 발전시키는 길이 되는 것이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철학(밝을 - 哲, 배울 - 學)’이란 단어는 본래 영어 'Philosophy'의 발음을 본따 만든 것으로 본 뜻에 충실한 번역은 아니다. 필로소피’(Philosophy)란 그리스어의 필로소피아(philosophia)라는 어원에서 온 단어로서 ‘필로’는 ‘사랑하다’, ‘좋아하다’라는 뜻이고 ‘소피아’는 ‘지혜’라는 뜻이다. 따라서 필로소피아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철학이란 단어의 뜻만으로는 단순히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일 뿐,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지 알 수 없다. ‘철학’ 그 이름만 듣고는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이 학문이 결코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동양에서는, 우리가 ‘철학’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머리에 떠오르는 개념과 썩 어울리는 뜻으로 ‘도(道)’라는 글자를 오래전부터 사용했다. 그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리카락을 날리며 걸어가면서 생각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철학이란 막연하고 신비롭고 골치 아픈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직접 발로 걸으면서 깨닫는 것이라는 뜻이다.
역사발전과정과 사회 정체성
우리나라는 일제 식민지라는 기형적 방식으로 중세 사회가 해체되면서 어느날 갑자기 자본주의사회로 편입되었다. 중세 사회의 불평등한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평등한 자격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근대사회를 우리 손으로 직접 건설하는 역사적 체험을 박탈당한 것이다.
‘친일파’라고 불리던 일제 부역 세력은 사회 상층부에 진입하여 정치와 경제를 장악했다. 그 체제는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 정부와 군사독재정권 시대를 거치는 동안 더욱 공고해졌다. 근대화가 진행된 수십년 세월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한 세력은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 집단이었다.
‘식민지’ 외에 우리 사회가 겪어야 하는 또 다른 혹독한 역사적 체험은 ‘분단’이다. 우리 사회 지배세력이 분단 상황의 특징을 실제보다 더욱 과장함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유린했다. 식민과 분단이라는 이중의 악조건을 경험한 나라는 많지 않다. 왜곡된 역사가 우리나라를 기형적 사회로 만들었다.
세상을 구조적으로 보자
구조적으로 보아야 사물을 옳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문제를 이렇게 그 주변의 사회적 관계와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것을 ‘구조적 인식’이라고 한다. 인간 개인의 문제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의 문제를 망각하는 함정에 빠지기 쉽다.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과 자본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 내면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것인 양 가르치고 사람들이 주로 인간 개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도록 조장한다. 개인의 성실한 노력과 인격적 완성만으로 세상의 온갖 어려움을 뚫고 인생의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처럼 훈련시킨다. 주변에 죄 없이 고통받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눈 질끈 감고 자기 혼자 아름답고 고운 생각을 품으면서 ‘자아 발견’을 하면 그것이 올바른 삶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은 것은 그 때문이다.
2. 노동자의 인간관
인간은 자주적 존재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예속에 저항하여 자주적인 삶을 살고자 원한다. 그래서 억압된 삶 속에 처하게 되면 강력하게 저항하게 된다. 짐승과 인간의 중요한 차이점 중에 하나는 바로 이런 자주적인 정신이다. 인간은 노예의 삶으로부터 점차 만인이 평등해지는 삶을 추구해 왔다. 인간의 권리와 자유가 확대된 것은 인간이 억압에 저항하고 자주적인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고, 집단을 이루며 서로 협력하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표현은 그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것은 사회가 발전하면 개인도 그만큼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인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사회가 발전하지 못하면 개인도 발전할 수 없다는 말이다. 즉 인간다운 삶은 개인적인 노력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가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3. 노동자의 세계관
변증법적유물론과 사적유물론
변증법적유물론, 유물변증법, 사적유물론, 유물사관 등의 개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때로는 위의 단어들이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나름껏 정리해보면, 변증법적유물론(유물변증법)은 쏘비에트의 볼셰비키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하여 공식화한 철학으로서 그 내용이 여러 차례 수정되기도 했고, 그 변증법적 유물론의 역사에 대한 적용이 사적유물론(유물사관)이다. 공산권 내부와 서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철학교조로서의 지위는 상당 부분 상실했으나, 그 철학 개념들은 아직도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선택적으로 유용하다고 볼 수 있다.
그 개념들의 정의를 새삼 살펴보는 것은 그 내용을 교조적으로 수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제도권 교육 속에서 지나치게 경원시됨으로써 제대로 접할 수 없었던 개념들을 한번 되짚어봄으로써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는 취지이다.
변화
모든 사물은 변화한다.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모든 사물은 스스로 변화하여 다른 어떤 것이 된다.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쉽게 눈에 보이는 변화도 있지만 잘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정지한 상태처럼 보이는 사물도 그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책상도 아주 느린 속도로 썩거나 마모되어 가고 있다. 그 속도가 너무 느려서 눈에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변화야말로 변할 수 없는 만물의 실상”이라는 사상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변치 않은 채 그대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만물은 다 생성(生成)한다. 만물은 흐를 뿐 어떠한 것도 정체되어 있지 않다. 만물은 이루어진 것이며,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아무 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 오직 변화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
“삶은 변화하고 있다. 오직 변화만이 영원하다.”
변증법
사물의 본질은 운동이며 과정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진리를 깨닫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광범위하게 승인된 방식들 중 하나가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본래 그리스의 대화술․문답법으로부터 출발했다. 대화할 때 서로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다가 나중에 합의를 이루는 과정을 상상해보면 변증법적 과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헤겔’은 인식이나 사물은 정(正)․반(反)․합(合)의 3단계를 거쳐서 전개된다고 생각했다. 정(正)의 단계란 그 자신 속에 모순을 포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단계이며, 반(反)의 단계란 그 모순이 자각되어 드러나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모순이 서로 부딪침으로써 합(合)의 단계로 발전한다. ‘정’과 ‘반’이 통일된 단계인 ‘합’은 동시에 새로운 ‘정’이 됨으로써 발전이 지속적으로 전개된다는 것이다.
노동운동 이론을 예로 들자면, 하나의 운동이론이 주장되면(정) 그 이론의 결점을 지적하는 이론이 주장되어(반) 갑론을박하다가, 두 이론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이론으로 정립되는(합)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발전하는 것이다.
모순
모(矛)는 창이고 순(盾)은 방패다. 이렇게 두 개의 서로 상반되는 관계를 모순이라고 한다. 사물은 수많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밝음과 어두움, 건강과 질병, 선과 악, 배부름과 굶주림... 물을 예로 들면, 물분자는 서로 흩어지려고 하는 힘(분산력)과 모아지려고 하는 힘(응집력)이라는 두 가지 서로 대립되는 성질을 갖고 있다. 열을 가하면 분산력이 커져서 증발하고, 온도를 낮추면 응집력이 커져서 얼음으로 변한다. 물에는 이렇게 두 가지 대립물이 서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상태를 ‘대립물의 통일’이라고 한다.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변화가 바로 운동이다. 운동이란 모순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이다. 사회운동이 올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의 모순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과제를 올바로 설정하고 활동 계획을 세우고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효과적인 실천할 수 있다.
모순은 사물의 내부에도 있고(내적 모순), 외부에도 있다(외적 모순). 우리나라를 예로 들면, 한국 사회 내에 존재하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는 내부의 모순이고, 미국 등 다른 나라로부터 받는 영향은 외부의 모순이다. 노동조합을 예로 들면, 한 사업장 안에서 노동조합과 회사의 관계는 내부의 모순이고, 다른 외부 노동단체의 지원이나 공권력의 간섭으로 생기는 관계는 외부의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노선에 따라 내면적 요인가 외면적 요인 중 어느 하나가 더욱 강조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변화의 근본 원인은 내적 모순”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지만, 항상 그렇지는 않다는 주장도 있다. 분명한 것은, 사물이 발전하는 데에 있어 이 둘은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헤겔 철학에서는 내면적인 것, 즉 내적 자기모순의 운동에 따른 변화의 발생을 더 기본적 요인으로 본다.
대립
모순된 관계는 서로 대립한다. 우리는 사물에 존재하는 대립을 냉정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대립을 그냥 인정하고 가만히 있다면 아무 발전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물은 대립을 극복하고 해결하면서 통합하는 과정을 거쳐 발전한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라는 속담처럼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면 아무 발전도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변화가 없는 삶과 사회는 침체된다. 모든 것은 항상 변화하여 다른 무엇이 된다. 그것이 살아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나 집단의 대립이 존재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지고 이윤을 사적으로 소유하는 ‘자본가’ 집단과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생계비를 버는 ‘노동자’ 집단의 대립이 기본 축을 이룬다.
이처럼 “만물은 대립에 의해서 발전한다.”는 사상 역시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플라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만물은 대립을 통하여 발생한다."
"투쟁은 만물의 아버지이며 만물의 왕이다."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조화가 아니라 실은 그 조화 속에 들어 있는 대립물 사이의 긴장이고 투쟁이다."
"병이 있기에 건강은 좋은 것, 악이 있기에 선은 좋은 것, 배고픔이 있기에 포만이 좋고, 피곤함이 있기에 휴식이 좋은 것이다."
사회의 발전을 대립물 사이의 갈등으로 설명하는 철학은 근대에 이르러 급조된 것이 아니라 수천년 인류 철학사의 한 전통이었다.
부정
‘부정’은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상태는 최상의 상태가 아니니 더 낳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다. 세상을 불신하고 ‘아니오’라고 부정하기만 하면 자기 자신이 계속 존재하고 유지되는 정체성을 상실할 수도 있다. 더 나은 발전을 위해 사물을 부정하는 태도는 진실을 깨닫는 데에 매우 유익하다. 현실이나 자신의 한계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헤겔이 “부정이 없다면 발전도 고양도 없다”고 말할 때의 부정을 그래서 ‘긍정적 부정’이라고 한다.
노동운동이란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이면서 부정적인 입장과 태도를 갖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대안을 천명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따라서 현실 속에서 노동운동은 체제에 대한 가장 과감한 부정의 세력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지양
낡은 것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것을 보존하는 변증법적 부정의 과정을 ‘지양’이라 한다. 독일어로 ‘지양’이란 단어는 1) 폐기하다, 2) 보존하다, 3) 고양시키다 등 세 가지 모두를 의미한다.
현존 질서를 ‘폐기한다’는 뜻에서의 지양은 변증법 철학이 매우 변혁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변증법에서 많이 거론되는 “낡은 것의 소멸과 새로운 것의 형성”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낡은 것을 폐기하는 것 없이 새로운 것은 형성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확인할 수 있다. 모름지기 새로운 상황으로 도약하려는 자는 우선 낡은 것을 지양, 즉 폐기시키지 않고는 자신의 뜻을 이룰 수가 없다.
‘보존한다’는 뜻의 지양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흔히 오해하는 것처럼 노동자들이 주장하는 ‘노동 해방’은 자본주의의 전면적 부정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에서 발달한 긍정적인 것 - 첨단 과학기술이나 높은 생산력, 개인의 자유와 창의력 - 들은 모두 보존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냉정하고도 객관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고양하다’는 의미의 지양은 사물을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린다는 뜻이다. 부정이 있는 곳에 고양이 있다. 부정으로서의 지양은 그것을 폐기함과 동시에 좋은 면들을 보존하면서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린다.
‘지양’의 과정은 노동운동 내부에서도 일어난다. 활동가의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혁신을 통한 실천이나 동지에 대한 비판도 하나의 부정이다. 우리가 다른 동지들을 비판하는 것은 더욱 올바로 인식하고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비판에는 애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다른 동지가 갖고 있는 긍정적이고 진보적인 요소는 살리면서 그의 잘못된 생각이나 실천을 바로잡는 비판이 되어야 한다. 비판과 비난이 다르다는 것을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사업을 평가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업이든지 좋은 면은 살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태도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노동조합 간부도 개인적으로 ‘지양’의 과정을 밟는다. 간부라는 자신의 조건과 입장을 일단 부정하고 조합원의 입장에 서서 요구를 파악한 뒤 다시 그 입장을 부정하여 책임 있는 노조 간부로서 대중의 요구와 조건에 입각한 방침을 세워 실천하는 과정이 바로 ‘지양’이다.
변화에는 규칙이 있다
① 양질 전화의 법칙(변화의 형태에 관한 법칙) : 작은 양적 변화가 점차 쌓이면 결국 한계를 무너뜨리고 근본적인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법칙이다. 물을 예로 들면, 열을 가해 온도를 높이면 점차 분산력이 높아지는 현상이 축적되다가(양적 변화) 그 변화가 계속되어 온도가 100도에 이르면 그때는 액체와 전혀 다른 성질의 기체(수증기)가 돼버리는 것(질적 변화)이다.
노동조합 활동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양적인 변화만을 생각하면 조합주의나 집단이기주의에 빠져 발전하지 않는다. 노동조합 활동 경험이 싸이면 그때는 노동운동을 정치 세력화한다든가 하는 새로운 질적 변화가 필요하다. 반대로 성실한 노력을 꾸준히 하지도 않으면서 질적인 변화에만 집착하면 한 방에 모든 일을 해치우려는 조급증에 빠지게 된다. 질적인 변화를 내다보면서 꾸준히 양적인 변화를 이루어나가는 태도와 함께, 양적인 변화가 어느 수준에 달했을 때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질적인 변화로 바꾸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한 사회 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자의 힘이 세지면 노동자 권익이 점차 신장되다가(양적 변화) 노동자의 힘이 자본가보다 압도적으로 커져서 노동자 중심 정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 지금까지와는 많이 다른 법과 제도를 갖는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질적 변화)이다.
② 대립물 통일의 법칙(변화의 원인에 관한 법칙) : 모든 사물은 내부에 서로 다른 요소가 상호연관과 상호부정의 상태에 있다는 법칙이다. 사물은 그 내부에 대립물 사이의 갈등을 발전의 원동력으로 갖추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은 자기 혼자 독단적(獨斷的)으로 존재할 수 없고 언제나 자기에 반대되는 것, 반대되는 현상과 대립하거나 때로는 서로 섞이기도 한다.
다시 물을 예로 들면, 응집력과 분산력이 서로 갈등하면서 평형을 이루고 있다가 분산력이 응집력보다 훨씬 커치면 수증기로 변화하고, 온도가 낮아져 응집력이 분산력보다 훨씬 커지면 얼음이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변화와 발전을 지향하는 세력과 기득권을 고수하려고 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진다.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배/피재배계급, 자본가/노동자계급, 보수세력/진보세력으로 나누어진 어느 집단에 소속되기 마련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처럼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 집단끼리의 대립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 것이 가장 슬기로운 방법인가 하는 것이다. 더욱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집단의 뜻이 관철될 때 그 사회는 올바르게 발전한다.
③ 부정의 부정 법칙(변화의 과정에 관한 법칙) : 전 단계를 뛰어넘는 질적인 변화는 단순히 전 단계를 말살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 단계보다 더욱 우수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복귀한다는 법칙이다. 한번 부정하고 나서 또 한번 부정하면 다시 원래의 것으로 돌아간다. 수학을 예로 들면 아주 쉽다. +1을 부정하면 -1이 되는데, 여기서 한번 더 부정하면 다시 +1이 된다. 다만, 이때의 부정의 부정 단계는 최초의 시작보다 훨씬 풍부해진 처음으로 되돌아간다는 원리이다.
보리를 예로 들면, 보리 씨앗이 땅 속에 묻혀 썩어서 보리줄기가 된다. 보리줄기는 씨앗의 ‘부정’이다. 그 보리줄기는 더 많은 보리 씨앗을 맺으면서 죽음으로써 다시 한번 ‘부정’의 과정을 밟는다. 씨앗→보리줄기→수많은 씨앗의 순환 과정이 이루어진다. 종자의 개량은 이처럼 ‘부정’과 ‘부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욱 좋은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유인원으로부터 오늘날의 인류가 되기까지의 발전 과정도 부정의 부정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4. 노동자와 역사
역사와 경제
지금까지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구하려는 많은 노력의 결론은 “경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그 해답을 구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토마스 카알라일이 ‘프랑스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변호사나 유복한 상인이나 시골 귀족의 상처받은 허영심이라든가 말 많은 철학이 아니라, 2천5백만의 사람들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굶주림, 추위, 괴로움... 이런 것들이 프랑스 혁명의 원동력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혁명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거룩한 이념은 굶주림의 해결이라는 절박한 문제에 뒤따라 나온 자연스러운 결론인 것이다.
역사와 경제에 대한 위와 같은 해석을 애써 부인하려는 노력이 최근까지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전의 역사관에서는 역사의 추진력을 운명․섭리․세계정신 등 초자연적 관념에 두었다. 암흑의 시대라고 불리는 중세에 “역사는 초월적 존재인 신의 정의가 실현되는 과정”에 불과했고, 20세기초까지도 역사는 ‘위인의 전기’라는 것이 상식이었다. 1950년대 미국의 탁월한 한 역사학자조차 그들의 동료 역사학자들이 “역사상의 위인을 사회적 및 경제적 허수아비처럼 취급하고 그 위인들에 대한 대량살육을 자행했다”고 비난했다.
사적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존재에 반드시 필요한 경제적(물질적) 요소가 정치․경제․법률․종교․학문 등의 관념을 발달시킨 기초라고 주장한다. ꡒ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ꡓ는 말도 같은 뜻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고 그 사회적 조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경제적 조건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훌륭한 개인이 아니라 다수 인간들이 생활해 온 모습이고, 그들의 경제적 욕구가 반영되어 온 과정이라는 것이다.
역사 발전의 법칙
선사시대를 빼고 실증적 기록이 남아있을 때부터 따지면 인류의 역사는 대략 얼마나 되는 것일까? 성경까지 역사적 기록으로 인정할 경우 기독교의 출발이 되었던 출애굽 사건이 기원전 1300년경이었으니 모두 2천5백년쯤 되었다고 보자. 2천5백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류 역사는 신기할 정도로 한쪽 방향으로 발전했다. 마치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것처럼 역사의 강물도 줄기차게 한쪽 방향으로 흘렀다.
고대 사회에서는 노예가, 중세 사회에서는 농노가 노동을 담당했다. 고대의 노예는 잘게 부숴져서 연못의 붕어밥이 되기도 했고, 중세의 농노는 결혼 첫날밤 신부와 함께 잘 수 있는 권리를 영주에게 받쳐야 했다. 그 시대에는 그 일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보편적인 가치관이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고대의 노예와 비교하면 중세의 농노는 한결 그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었고, 중세의 농노와 비교하면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자 역시 그 자유와 권리가 크게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노동을 직접 담당했던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가 점차 확대되어 온 반면 상대되는 계급은 반대의 경로를 밟았다. 고대의 귀족보다 중세의 영주는 그 권력이 축소되었고, 중세의 영주보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본가는 그 권력이 훨씬 제한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역사는 담당 주체의 세력 확대 과정이다”라고 표현한다. 그 진행 방향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자신있게 반대할 수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가 진행되는 방향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성공할 수 없다. 노예제도가 문명 사회에서 철폐될 수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데올로기이다. 히틀러 같은 독재자가 나타나면 역사가 잠시 후퇴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지금은 신자유주의라는 망령 때문에 역사가 잠시 주춤거리고 있을 뿐이다.
역사 담당 주체의 피나는 노력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자유와 권리가 확대되는 역사 발전 과정에는 그 ‘주체’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 시대 노예의 피 어린 역사는 영화 ‘스팔타쿠스’에서 그 일면을 볼 수 있고, 중세 시대 농노의 해방 전쟁은 ‘토마스 뮌쳐’ 등에서 그 모범을 본다. 역사의 강물은 그렇게 ‘밀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도도하게 흐르는 것이 가능했다.
노동운동의 합법칙성
노동운동은 언제나 일정한 속도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침체국면에 빠지기도 하고, 고양국면으로 돌아서기도 한다. 정체되기도 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도 한다.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이것이 노동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이다.
외형상 침체국면은 바꾸어 말하면 노동자들의 요구와 불만이 축적되는 시기이다. 침체 가운데서도 노동운동 역량은 쉬임 없이 고양․축적된다. 정체는 비약적 발전을 준비한다. 축적된 불만은 다음의 고양국면을 향해서 나아가는 과정이다. “어려울 때는 버티는 쪽이 이긴다”거나 “승리할 때까지 패배한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노동운동은 침체와 고양, 정체와 비약, 패배와 승리를 거듭하면서 역사를 끌고 가는 기관차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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