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통신산업개발 제도개선안…노조 "고용보장 없는 비정규직화" 강력 반발
호봉제의 연봉제 전환인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인가. 한국통신산업개발(KTRD)이 지난 1일 도입한 신직제개편 등의 내용을 담은 제도개선안이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KTRD는 건설업과 건물의 관리·보수·유지 등을 맡고 있는 시설용역업체로 정규직과 계약직, 일용직, 미화직 등의 직군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2월1일자로 미화직을 제외한 모든 직군을 하나로 통합, 사원과 대리, 과장, 차장, 부장 등의 직급을 신설했다. 이와 함께 호봉제를 적용받던 정규직들은 연봉제를 제안받아 1월31일까지 124명(지난해 10월말 기준)의 정규직 중 40명이 자율퇴직 뒤 연봉제로 재계약 했으며 23명이 조기퇴직, 1명이 정년퇴직 했다. 그러나 회사의 직제개편안 수용을 반대해 오던 남은 60명의 정규직들이 1월31일자로 일괄 정리해고 통보를 받아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
한국통신산업개발노조(위원장 이원식)는 “회사는 경영상 이유에 의한 구조조정이라는 이유로 해고회피를 위한 자구노력도 하지 않은 채 전직원의 비정규직화를 시도하고 있다”며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면서 지난 15일 회사 앞 천막농성에 들어갔다.
용역체결 위해 결국 정리해고
KTRD는 97년 출범 당시 KT의 자회사였다가 2001년 정부의 공기업 자회사 민영화 방침에 따라 독립적인 회사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물량의 90% 이상을 KT로부터 받고 있다.
지난해 11월2일 KTRD는 KT와의 3년 협약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재계약을 체결했으나 이 과정에서 KT가 요구했던 협약기간 1년으로 단축, 용역대가 110억원 삭감, 인력 83명 감소 등을 수용했다.
이에 따라 KTRD쪽은 “KT와의 계약체결이 1년 단위로 이뤄지게 됨에 따라 직원들도 연봉계약제로 체결하는 게 불가피”하며 “2001년 KTRD가 민영화될 때 노사정에서 정규직에 대한 3년간의 고용안정을 보장했지만 지난해 그 기간이 만료됐고, 현재 용역대가가 삭감된 상황에서 정규직의 임금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밝혔다.
또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격차와 차별 등을 시정하기 위해서도 하나의 연봉테이블로 임금체계를 가져가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다. KTRD는 “호봉제는 1년 뒤 호봉승급분이 있었지만 연봉제였던 비정규직들은 그런 혜택도 없이 해마다 연봉계약을 해야 했으며 정규직 임금의 30%선을 받아왔던 것도 사실”이라며 “신직제개편은 이러한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규직들이 연봉제로 편입되면 60, 70%의 임금이 깎이는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노조는 “대가가 110억원 삭감됐어도 인원 역시 83명이 줄었기 때문에 실질 삭감분은 40, 50억원”이라며 “노조는 회사에서 자구 노력을 한다면 임금 삭감 등의 아픔은 감수하겠다고 전했지만 회사는 임금 부분에 대해서는 논의하지 않고 제도개선에 대해서만 얘기했다”고 주장했다. 또 “계약은 경영진이 하는 것인데 계약시 대가가 삭감된 부분에 대해서 회사쪽에서 책임을 지지 않고 정규직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꼴"이라며 "해고 회피를 위한 자구노력을 하지 않은 부당한 해고”라고 비판했다.
임금체계 단일화, 결국 전원 비정규직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KTRD의 신직제개편을 호봉제의 연봉제 전환이라는 단순한 임금체계 구조의 변화로 볼 것인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KTRD는 기존 정규직에는 호봉제 임금체계를, 계약·일용·미화직들에게는 연봉제 임금체계를 적용해 왔다.
KTRD는 신직제개편의 핵심 내용은 호봉제를 폐지하고, 연봉제로 전환하는 방식으로 임금체계를 단일화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회사쪽 관계자는 “신직제는 직급이 없던 비정규직들에게 직급을 부여하는 제도이며, 2중 임금체계를 일원화시키는 것”이라며 “임금체계가 바뀐 것은 연봉계약직 사원의 의미이지 정규직의 비정규직 전환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 “이는 고용을 1년마다 새로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라며 1년 단위 계약 체결이 곧바로 1년 단위 고용계약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노조는 “단순한 호봉제 임금체계의 연봉제 전환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으며 그것은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전달했다”며 “문제가 되는 것은 고용이 안정돼 있던 정규직들이 신직제에 편입된 뒤 고용안정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
즉 KTRD가 타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을 경우 발생되는 사업장 감소와 인력 감축시 사원들이 재계약을 하지 못하게 되는 등 고용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 이는 고용안정을 보장받아온 정규직을 모두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에 다름아니라는 주장이다.
이원석 위원장은 “노동계에서 비정규직의 차별 철폐와 정규직화를 주장하고 있는 마당에 오히려 정규직을 비정규직화 시키는 말도 안되는 일이 KTRD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KTRD에서 비정규직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는 것은 '비정규직' 개념이 하나로 정리돼 있지 않은 데 따른 것으로 보여진다.
이에 대해 조성기 경총 전문위원은 “KTRD의 이른바 ‘비정규직’이라고 인식되는 근로자들은 대다수가 기간제계약직 근로자라고 평가되며, 최근 ‘고용안정성 확보나 근로조건 개선보호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비정규직의 개념에 포함된다”며 “KTRD의 기간제계약직 근로자들이 반복갱신되고, 회사에서는 정규직으로 보고 있더라도, 법률적 의미에서는 비정규직이라고 인식될 수밖에 없어 이 점에 대해서는 향후 관심을 갖고 비정규직입법동향을 주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KTRD의 제도개선 중 또 하나의 논란은 노조의 조합원 범위 제한이다. KTRD는 대리급 이상 직원 중 보직을 가진 사람은 노조 조합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회사쪽 관계자는 “정규직들을 신직제에 맞춰 평가를 해보니 대부분 과장, 차장급이 될 사람들이었다”며 “사람을 관리하고 인사 평가에 관여하는 사람이 노조에 가입하는 것이 과연 맞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에 대해 노조는 “정규직의 대부분이 대체로 대리 이상인데, 조합원 범위를 이렇게 기계적으로 재단하면 노조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며 “노조를 무력화시키려는 부당노동행위”라는 입장이다.
비정규직 차별 시정 긍정적 측면도
KTRD의 제도개선이 정규직에 대한 일방적 해고와 연봉제계약직 전환에 따른 고용불안을 가중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려는 시도를 했다는 면에서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즉, 정규직과 계약직, 일용직으로 나눠져있던 직군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비정규직을 정식 사원으로 인정하고 대리, 과장 등 직급을 부여하고 승진의 기회를 동일하게 줬다는 점은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 KTRD 비정규직들로 구성된 전국시설관리노조 한국통신산업개발지부(지부장 이용혁)도 "이번 직제개편은 우리가 노조를 만들면서 지난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요구해 왔던 사항"이라며 "임금체계의 단일화와 직급별 직제개편 등에 대해서는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같은 제도개선이 KTRD 노동자들의 차별 시정에는 한몫 했다고 하더라도 노동자들의 고용안정을 확보하지는 못했다는 점은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한편 한국통신산업개발노조는 정규직 60명에 대한 정리해고가 철회될 때까지 천막농성을 계속한다는 방침이며, 부당해고 고소 등 법적 수단 등을 동원해 투쟁을 지속할 계획이다
|